이정성 기자
【에코저널=밴쿠버·캠룹스】결국 우려했던 일이 현실이 됐다.
멕시코 칸쿤에서 출발해 캐나다 밴쿠버 국제공항(IATA 공항코드 ‘YVR’)에 도착한 시간은 현지시간 2월 3일 오후 11시 35분(한국시간 2월 4일 오전 4시 35분), 공항 밖을 나와보니 눈이 내리고 있다.
이튿날 오전 7시 15분, 공항버스 플랫폼에서 출발해 363km 가량 떨어진 캠룹스(Kamloops)까지 이동하는 구간에는 로키산맥이 포함돼 있다. 로키산맥은 간혹 폭설로 인한 차량통제가 이뤄지기도 한다. 통제가 아니더라도 눈길 교통사고가 빈번해 차량 정체가 장시간 이어지기도 하기에 겨울철 운전자들이 기피하는 구간이다. 특히 ‘마의 구간’으로 불리는 ‘No.5 highway(코퀴할라 하이웨이)’는 여름에도 눈이 내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8시간 가까이 공항에서 대기하면서 잠시도 눈을 붙이지 못했다. 버스 스케줄과 관련, 미국에서 공부하는 아들과 캐나다에 거주하는 누나와 계속 소통하면서 일정에 차질 없기를 바랐다.
‘라이더 익스프레스’의 버스. 밴쿠버 국제공항에서 출발, 363km 가량 떨어진 캠룹스를 거친 뒤 다시 620km 거리의 캘거리까지 1천 km 정도를 운행한다. 11시간∼12시간 정도 소요된다.
아들 녀석은 “버스가 때론 정시보다 일찍 출발하거나, 별도 통보 없이 연착하는 등 예측 불가능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찍 플랫폼에서 대기하는 게 좋겠다”고 권했다.
실제로 우리 가족이 지난 2022년 5월, 미국 뉴욕에서 이용했던 ‘플릭스버스(Flixbus)’가 아무런 통보 없이 연착해 노심초사했던 좋지 않은 기억이 되살아났다. 뉴욕 맨해튼 미드타운 터미널에서 뉴욕 나이아가라 폭포까지 441마일(710km) 구간을 운행한 버스는 8시 50분 출발 예정이었는데, 30분이 지난 9시 20분에 버스가 도착했었다. 이어지는 일정에 차질을 빚을까 봐 기다렸던 30분이 3시간 이상으로 느껴졌었다. 버스회사와 전혀 연락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밴쿠버 국제공항 ‘라이더 익스프레스’ 버스 전용 정차 12번 플랫폼.
출발 예정 시간 30분 전부터 예약한 버스회사 ‘라이더 익스프레스’ 사인이 적힌 12번 플랫폼에서 대기했는데, 우리 부부 외에 흑인 남성 에미카(Emeka, 52), 백인 여성 모니카(Monika, 45)까지 모두 4명이 같은 버스를 기다렸다.
7시 15분인데도, 버스는 도착하지 않았다. 누나는 힘들게 버스회사 연락처를 알아내 전화로 통화해 상황을 알아보고, 아들은 실시간 추적 어플로 차고지에서 해당 버스의 출발 여부를 살폈다.
버스가 오지 않자, 모니카는 제자리 뛰기로 추위를 이기려 했고, 에미카는 빠른 걸음으로 플랫폼을 연신 오갔다. 영상 30도의 칸쿤에서 곧바로 날아 온 우리도 눈 내리는 영하의 밴쿠버 날씨를 야외에서 감당하기 어려웠다.
‘라이더 익스프레스’의 버스 60분 연착 메시지.
잠시 뒤 누나는 버스가 8시 15분으로 60분 연착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하지만 8시 15분에도 버스는 오지 않았다. 이후 9시 25분, 9시 50분 등 버스회사는 시간만 미뤘고, 끝내 버스는 오지 않았다.
2시간 30분 동안 추위에 떨며 ‘동병상련(同病相憐)’을 느끼던 우리 일행 4명은 알 수 없는 동지애가 싹텄다. 캘거리에 사는 에미카는 “어제 오후 2시에 예약한 버스를 타기 위해 서둘러 우버 운임을 비싸게 지불하고 왔다”며 “공항에 1분 늦었는데, 막 출발하는 버스가 세워주지 않고 떠나 하루를 공항에서 노숙했다”고 말했다.
좌측부터 모니카, 에미카, 기자, 기자의 아내.
나이지리아 출신인 에미카는 경영학을 전공했고, 은행원으로 일하다 10개월 전 캐나다에 왔다. 슬하에 아들, 딸 각각 2명씩 4남매가 있다. 21살의 큰딸은 영국 런던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있고, 18살짜리 아들은 캐나다 에드먼턴 간호학교에서 공부하기 위한 비자수속을 밟고 있다. 아내는 나이지리아에서 나머지 남매를 키우고 있다.
캘거리와 캠룹스에 각각 한 채씩 모두 두 채의 주택을 소유한 모니카는 남매를 키우는 이혼녀다. 혼자만 짐이 없어 물어봤더니 “에어캐나다에서 캐리어를 분실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의 각각 딱한 사정을 전해 들은 우리 부부는, 안타까워하면서도 그나마 위안을 삼는 계기가 됐다. “버스가 연착되더라도 캔슬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게 됐다.
현지인 수준으로 영어가 능통한 누나는 버스회사에 강력한 항의를 이어갔고, 10시께 버스회사 직원이 직접 우리를 찾아왔다.
좌측부터 ‘라이더 익스프레스’ 직원, 에미카, 기자의 아내, 모니카.
‘라이더 익스프레스’에서 보낸 미니밴.
‘라이더 익스프레스’ 직원은 우리 일행 4명을 미니밴으로 안내한 뒤 운전기사에게 30분 가량 거리의 버스가 있는 곳에 내려주도록 했다.
10명의 다른 승객이 이미 도착해 있었고, 우리 4명을 포함해 14명의 승객을 태운 버스는 10시 45분에서야 출발했다. 중간에 밴쿠버 시내에서 4명을 더 태워 56인승 버스에 모두 18명이 탑승했다.
버스 내부에서 전기 아울렛 사용이 가능하다.
‘라이더 익스프레스’ 버스는 와이파이 사용이 가능했고, 화장실도 갖췄다. 전기 아울렛이 있어 노트북 사용도 편리했다.
버스는 밴쿠버에서 예정 출발시간인 7시 15분 보다 3시간 30분 늦은 10시 45분에 출발해 363km 가량 떨어진 캠룹스로 향했다.
로키산맥 설경.로키산맥을 지나는 도로는 다행히 제설작업이 이뤄져 무난하게 통과했다. 로키의 황홀한 설경은 조마조마했던 심정을 위로해주는 듯했다.
코퀴할라 하이웨이(Coquihalla highway) 구간의 간이화장실.당초 캠룹스 버스 도착 예정 시간은 1시 5분이었는데, 2시간 25분 늦은 오후 3시 30분에 무사히 도착해 우리 부부와 모니카를 내려줬다. 캠룹스에서 에미카의 목적지인 캘거리까지는 620km, 7∼8시간 정도 소요된다.
기자의 누나가 온기가 식지 안도록 준비한 비빔밥.
캠룹스 도착 직후 마중 나온 누나 차량 안에서 온기가 가시지 않은 김치볶음밥을 허겁지겁 먹었다. 칸쿤 리조트에서 먹었던 세계 각국의 어떤 코스요리보다도 더 맛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