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코저널=서울】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이 입지선정위원회 등 송전선로 건설 절차를 한 달간 중단하겠다고 약속한 가운데, 환경운동연합과 시민환경연구소가 ‘대한민국 전력망 개편 방안 보고서’를 발간했다.
이 보고서는 용인반도체 산단 건설과 재생에너지 확대 과정에서 붉어지고 있는 계통 접속 지연과 송전망 건설 갈등 문제의 원인을 ‘선로 부족’이 아니라, 원전·석탄 중심으로 설계된 운영 규칙과 전력수요집중·거버넌스 문제에 있다고 진단한다.
시민환경연구소 최준호 소장은 “태양광 패널이 다 지어졌는데도 전기를 버려야 하는 출력제어, 수년씩 계통 접속을 기다리는 현실이 모두 선이 없어서가 아니라 규칙과 정책이 잘못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라며 “장관의 한 달 중단 선언은 이 구조를 바꿀 골든타임”이라고 말했다.
보고서 작성에 참여한 환경운동연합 정책변화팀 배슬기 활동가는 “전력망 관련 사회적 갈등의 핵심은 전력수급기본계획 수립 초기의 정보 비대칭과 정부 정책의 비합리성”이라며 “지금은 내 집 위로 송전선로가 건설되는 데, 그 계획이 확정되서야 국민들이 알게 된다”고 현장의 목소리를 전했다.
배슬기 활동가는 “정부는 재생에너지・분산에너지 확대를 명목으로 송전선로 건설을 추진하지만 용인 반도체 국가산단, LNG・핵발전소 등 대규모 오염 발전소의 신규 건설을 추진하고 있어, 정부 정책의 정합성이 떨어진다”고 지적하며 “전력수급기본계획 단계부터 계통 정보를 통합 공개해 전력망 확충이 어떤 구간에 필요하고, 대안이 충분히 검토됐는지 등 사회적 숙의가 제도화되야 한다"고 말했다.

보고서는 현재 전력계통 혼잡 상황에서 재생에너지가 화석연료·원전보다 오히려 출력제어의 우선 대상이 되는 구조를 핵심 문제로 지목한다. 탄소중립 목표를 실현하려면 설비를 늘리는 것만큼, 재생에너지가 계통에 먼저 연결되고 먼저 급전되는 운영 원칙의 법제화가 필수적이라는 것.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따르면 2038년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 목표는 32.9%다. 그러나 현재 재생에너지는 접속 대기 상태로 수년씩 묶이거나, 접속 이후에도 출력제어로 발전을 강제 중단당하는 경우가 잇따르고 있다. 출력제어가 집중된 제주도의 경우, 최소발전용량을 낮추는 운영 규칙 변경만으로도 출력제어의 최대 70%를 줄일 수 있다는 분석도 보고서에 담겼다.
비어 있는 전력망부터 써야, 비선로대안 의무화 촉구
보고서는 일본·유럽·북미 사례를 비교 분석해 송전망 신규 건설을 소화하면서도 재생에너지 수용 능력을 높일 수 있는 경로가 존재함을 보여준다.
미국 뉴욕 사례로 수천억 원짜리 변전소 증설 대신 수요반응과 에너지저장장치를 조합해 계통 병목을 해소한 ‘브루클린·퀸즈 수요관리 프로젝트(BQDM)’가 대표 사례로 꼽힌다. 보고서는 한국도 송·변전 투자 계획 수립 시 이 같은 비선로대안(Non-Wires Alternatives) 검토를 의무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유럽에서는 특정 구간 전력망이 재생에너지를 얼마나 더 수용할 수 있는지를 나타내는 ‘수용률 지도’를 GIS 기반으로 공개해, 사업자의 입지 선택과 계통계획의 근거로 활용하고 있다. 보고서는 한국도 제주·전남·강원 등 재생에너지 집적 지역부터 수용률 평가와 지도 공개를 단계적으로 도입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한편, 한국은 탈석탄 기조에 맞춰 앞으로 순차적인 석탄발전소 폐쇄가 예정돼 있다. 40년 설계수명이 만료된 한빛1호기 핵발전소 등에 연결됐던 계통 활용방안은 부재하다. 현재 7개의 수도권발 송전선로 건설 계획에 ESS, 수요반응 등 비선로대안이 검토되지 않았다.
발전은 지방, 소비는 수도권…공간 불균형이 갈등 원인
보고서는 현재 한국의 발전·수요 공간 구조도 문제로 짚는다. 재생에너지는 전남·강원·제주 등 지방에 집중되는 반면 전력 소비는 수도권과 충청·영남 산업벨트에 쏠려 있다. 이 불균형을 해소하지 않고 송전선로 건설을 단일 해법인 양 추진하게 되면, 지방 농촌과 산을 가로지르는 고압 송전탑 건설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데이터센터·반도체 공장·RE100 기업이 재생에너지 생산지 인근으로 입지를 유도받는 ‘수요 분산 전략’과 재생에너지 우선접속·유연접속 제도화를 통한 ‘기존망 활용 극대화 전략’이 결합될 때 비로소 불필요한 송전망 증설을 줄일 수 있다고 강조한다.
4대 정책 패키지와 단계별 로드맵 제시
보고서는 ▲재생에너지 우선접속·유연접속 법제화 ▲출력제어·혼잡 관리 규칙 명문화 및 유연성 시장 개편 ▲비선로대안 의무화와 데이터·제어 인프라 구축 ▲국가 전력망 투명성 플랫폼 구축·독립 규제 기능 강화 등 4대 정책 패키지를 제시한다.
단기(1~2년)에는 전기사업법 개정을 통한 우선접속 원칙 명문화와 수용률 지도 시범 공개, 중기(3~5년)에는 유연성 시장 정착과 비선로대안 제도화, 장기(6~10년)에는 재생에너지 수용률 90% 달성과 전력망·국토·에너지 통합 거버넌스 완성을 목표로 한다.
유럽의 10개년 송전망개발계획(TYNDP)을 참고해 재생에너지 목표·전원 믹스·송배전망·해저케이블·에너지저장을 통합 분석하는 ‘한국형 통합 전력망 개발 계획(K-TNDP)’ 법제화도 제안한다.
보고서는 전력망 확충 지연이 단순한 컨트롤타워 부재의 문제가 아니라, 에너지전환과 전력망 투자 간 정책적 우선순위가 명확하지 않은 데서 비롯된다고 진단한다. 그러면서 ”지금의 선택은 향후 수십 년간의 에너지 시스템과 사회적 비용 구조를 좌우한다“고 경고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