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코저널=서울】재단법인 숲과나눔은 유용예 개인전 ‘두 번째 살갗, 303.8ha’를 7월 11일부터 7월 31일까지 공간풀숲에서 개최한다. 해녀 사진작가이자 가파도 어촌계장인 유용예가 직접 경험하고, 목도한 바다 생태계의 변화 양상을 사진 작품과 영상, 설치물을 통해 다각도에서 구현한다.
‘303.8헥타르’는 제주 가파도 마을 공동어장의 면적이다. 행정과 측량의 언어로 쓰인 이 숫자는 위성사진 위 하나의 폐곡선으로, 지적도 위 하나의 단위로 바다를 환원한다. 전시 타이틀은 이 두 개의 척도를 의도적으로 나란히 세운다. ‘살갗’으로 바다를 아는 몸과 바다의 면적을 측량한 숫자이다. 전자는 피부의 앎이고 후자는 좌표의 앎이다. ‘두 번째 살갗, 303.8ha’는 이 두 앎이 같은 바다를 가리키면서도 끝내 포개지지 않는 자리에서 출발한다.
해녀가 바다로 들어가기 전 가장 먼저 입는 것은 잠수복이다. 몸에 밀착돼 차가운 물과 살 사이로 얇게 끼어드는 이 검은 피부는, 인간이 바다라는 다른 세계로 건너가기 위해 덧입는 두 번째 살갗이다. 그러나 가파도에서 십수 년을 물질해 온 유용예 작가에게 두 번째 피부는 한 벌의 장비에 그치지 않는다. 거듭된 잠수 속에서 그의 몸 전체가 바다와 맞닿는 하나의 감각막(膜)이 됐다. 물의 온도와 염도, 조류의 방향과 수압, 그리고 해마다 미세하게 달라지는 바다의 기척을 살갗으로 읽어 내는 몸. 그 몸이야말로 이 전시가 주목하는 두 번째 피부다.
생태학적으로 볼 때, 피부는 안과 밖을 가르는 벽이 아니라 둘이 끊임없이 넘나드는 막이다. 바다는 해녀의 두 번째 피부를 통과해 몸 안으로 흘러든다. 차가움과 짠기, 압력, 그리고 근래에는 마땅히 차가워야 할 물의 미지근함까지. 기후 위기는 흔히 지구 평균기온이나 해수면 같은 거대한 수치로, 너무 광대하고 너무 느려 한 사람의 감각으로는 결코 붙잡을 수 없는 규모로 이야기된다. 그러나 유용예 작가의 작업에서 그 거대한 변화는 가장 작고 친밀한 자리, 곧 피부에서 먼저 감지된다. 수온계가 가리키기 전에 살갗이 미지근함을 알고, 통계가 잡아내기 전에 작년에 있던 것이 올해 사라졌음을 몸이 안다. 두 번째 살갗은 측정 불가능한 재난을 감각 가능한 사건으로 번역하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정직한 생태적 기관이다. 이 전시의 첫 번째 생태학적 가치는 여기에 있다. 추상으로 떠돌던 기후 위기를 다시 몸으로, 살갗의 사건으로 되돌려 놓는다는 것이다.
강나미 해녀는 이렇게 증언한다. “바다는 점점 달라지고 있어. 처음에는 모자반이 안 나더니, 그다음에는 미역이 사라지고, 또 톳이 없어졌어. 벌써 칠팔 년은 된 것 같아. 먼바다도 마찬가지야. 재작년 여름이 지나고 바다에 나가 보니 처음 보는 시커먼 풀들이 자라고 있었어. 그런데 감태는 다 없어졌더라. 해녀들이 농담처럼 말해. “감태 한 개만 볼 수 있어도 소원이 없겠다.” 그만큼 바다가 텅 비었어. 배를 타고 여기저기 다니며 아직 소라와 전복은 잡지만, 해초가 없어지면 우리도 함께 살아가기 어려워. 어제도 할망당에 가서 한참 앉아 빌었어. 미역도 다시 나게 해 주십시오. 톳도 다시 나게 해 주십시오. 감태도 다시 나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바다를 위해 빌고 왔다고 한다.
유용예 작가는 전시작, ‘해녀여지도(海女輿地圖)’에서 303.8헥타르 안에 깃든 바당밭의 기억을 펼쳐 보인다. 객관적 측량이 아니라 몸으로 축적된 경험과 기억으로 구축된 해녀들의 심상 지형은, 행정의 지도와 나란히 놓이는 또 하나의 지도학이자 몸이 그린 생태 지도다.
또한 ‘바다의 증인들’인 가파도 해녀들의 초상과 증언을 통해 바다 생태계 위기를 실감할 수 있다. 해녀의 몸은, 그 자체로 생태 붕괴를 증언하는 살아 있는 기록이다. ‘사라진 풍경’과 ‘기억의 좌표’에서는 고수온 속에 자취를 감춘 바다와 한때 그곳에 있던 기억이 나란히 놓이고, 해녀 공동체의 경험적 지식과 현대 사회의 데이터가 처음으로 한자리에서 만난다. 마지막 ‘작가의 방’은 변화하는 바다를 온전히 기록하려 했으나, 끝내 완결될 수 없는 기록의 과정을 증언한다.
전시 연계 행사로 ‘작가와의 만남’이 7월 25일 오후 4시에 공간풀숲에서 열린다. 작가의 생생한 작품 설명과 함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