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성 기자
【에코저널=오쿠노시마섬】“먹이를 들고 토끼를 찾아 섬을 헤매는 이들을 본 적이 있는 가?”
조용필이 노래한 ‘킬리만자로의 표범’ 가사 중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를 본 일이 있는 가”와 다른 형태의 상황을 떠올리며 토끼섬으로 유명한 ‘오쿠노시마섬(大久野島)’을 가기로 했다.
일본 도착 첫날, 히로시마 현(広島県) 오노미치 시(尾道市) 전통가옥에서 하룻밤만 묵은 뒤 이튿날은 이웃한 도시 미하라 시(三原市)로 이동해 작은 규모의 비즈니스텔에서 푹 잤다. 탕 하나의 작은 규모지만, 온천도 무료다. 정갈하고 소박한 메뉴의 뷔페식 아침식사도 공짜로 줘서 맛있게 먹고 길을 나섰다.
미하라시 행정구역에 히로시마 공항도 포함되지만, 미하라역(三原駅)에 옆에 있는 호텔과의 거리는 20km 정도 떨어져 있다.
11일 오전 10시 5분, 미하라역에서 오쿠노시마섬을 가기 위해 다케하라 시(竹原市)에 위치한 타다노우미역(忠海駅)으로 향하는 열차를 탔다.
출발한 지 20분 가량 지나자 열차 안내방송을 통해 “토끼로 유명한 오쿠노시마섬에 가려고 하는 사람은 다음 역인 타다노우미역에서 내리기 바란다”는 내용이 전해진다.
미하라역 대합실에서 흰색 비닐봉지에 담긴 양배추를 들고 있는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 청년을 봤다.
“대견스럽게 직접 장을 봤구나”라고 짐작했는데, 10시 31분 타다노우미역에서 함께 내렸다. 나중에 선착장에서 다시 만난 후에야 얼굴에 여드름이 가득한 그 청년이 일행도 없이 혼자 오쿠노시마섬을 찾은 것을 알게 됐다.
섬으로 들어가기 전 음료수를 사기 위해 역 바로 옆에 있는 패밀리마트를 찾았는데, 당근, 양배추 등 토끼 먹이를 판매했다. 섬에서도 팔 것 같아 사지 않았다.
타다노우미역에서 오쿠노시마섬으로 가는 배를 타는 선착장까지는 걸어서 5분 거리, 1㎞도 되지 않는다. 인형 등 토끼 캐릭터 위주의 기념품을 판매하는 ‘The Gateway to Rabbit Island’라는 건물 내 자판기에서 섬으로 가는 배 승선권을 샀다.
배는 출발한 지 10분만에 오쿠노시마섬에 도착했다. 세토나이카이 국립공원(瀨戶內海國立公園, Setonaikai National Park) 내에 위치한 오쿠노시마섬을 관리하는 일본 환경성(環境省)이 ‘토끼 원더랜드’로 소개하는 관광안내에 따르면 섬의 면적은 70만㎡(21만1750평)다. 나지막한 산도 있는데, 최고 고도는 약 108미터다. 자전거를 빌리면 30분 만에 섬을 둘러볼 수 있다. 토끼 먹이를 줘가면서 천천히 걸으며 섬을 둘러봐도 2∼3시간이면 충분하다.
관광안내에는 오쿠노시마섬에 서식하는 토끼가 ‘700마리 이상’이라고 하는데, 전혀 믿기지 않는 통계다. 섬에 들어서자마자 눈에 띄기 시작한 토끼들을 산책로는 물론 나지막한 산 정상, 도로, 캠핑장 등 섬 곳곳에서 수시로 만났기 때문이다.
섬 안에는 글램핑장과 환경성이 운영하는 국립공원 리조트도 있다. 숙박시설에서 편안하게 쉬고, 토끼들과 어울리는 시간도 가질 수 있다.
토끼의 생태적 특징인 강한 번식력을 감안하면 ‘700마리 이상’이 언제 집계한 수치인지는 모르겠지만, 최소 6개월 단위로 토끼 개체수를 조사하는 게 맞는 것 같다. 환경성의 토끼 보호 정책에 따라 개와 고양이 등 반려동물 입장을 금지하고 있다.
환경성이 관리하는 오쿠노시마섬 토끼들은 까마귀 등을 빼면 천적도 거의 없는 것 같아 개체수 증가 속도가 일반 야생에 비해 무척 빠를 것으로 보인다. 보통 토끼는 한 번에 열 마리 넘는 새끼를 임신해 30일 만에 낳는다.
새끼 토끼도 금방 자라서 생후 20일이면 자립 가능하다. 빠르면 반년, 늦어도 10개월이면 짝짓기가 가능해 질 정도로 자란다. 토끼 수명은 보통 8~10년, 길게는 13년까지 산다고 한다.
오쿠노시마섬을 둘러보면서 만난 토끼들의 수와 생태적 특징 등을 감안하면 700마리는 턱없이 부족한 수치다. 최소 7천 마리, 아니 수 만 마리라고 해도 믿을 수 있다.
오쿠노시마섬의 토끼 대부분은 사람을 보면 달려든다. 사람들은 길목마다 지키고 있는 토끼들의 불심검문(不審檢問)을 피할 수 없다. 섬에서 먹이를 사려고 했지만, 파는 곳이 없었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다가서는 토끼들에게 가방에 있던 오렌지를 꺼내 주는데, 껍질만 먹는다.
오쿠노시마섬 여러 곳에는 전 세계 사람들이 공감하는 환경과 자연보호 필요성을 알리는 문구가 적혀있다. 섬을 찾은 방문객 90% 이상은 일본인이다. 관광지임에도 외국인들이 드물었다. 배에서 외국인은 1명만 봤다. 라틴계 여성과 일본 남성 커플이었다.
섬을 둘러보다 토끼 검문을 받아 산책로에 멈춰 선 스위스 국적의 헐먹(Hulmuk, 35·남)과 에스텔라(Estella, 32·여)는 올해 4월부터 일본 여행을 시작했다고 한다. 도쿄, 오사카, 고베, 후쿠오카 등을 방문했는데, 시간이 되면 한국도 찾을 예정이라고 한다.
나보다 앞서 배를 타고 섬에 온 헐먹은 “인터넷으로 오쿠노시마섬에 정보를 얻어 방문했는데, 참 신기하다”며 “토끼들에게 줄 먹이를 넉넉하게 갖고 오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고 말했다. 둘 관계를 묻는 질문에 “그냥 좋은 친구사이”라고 대답했다. 돌직구로 “둘이 결혼할 의사는 없느냐”고 재차 묻자 “maybe~”라고 답했다.
섬 곳곳에 앉아있는 사람들 곁에는 항상 토끼가 함께 있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토끼들에게 각자 챙겨온 먹이 주기에 바빴다. 생각보다 어린이들은 적었다. 오히려 연세 지긋한 어르신들이 더 많아 보였다. 몸이 불편한 할머니도 휠체어를 탄 채 토끼 먹이를 줬다.
산 위에서도 토끼를 만난다. 소풍을 나온 가족들 곁에서도 토끼가 함께 만찬을 즐긴다.
토끼가 많다 보니 똥도 많은 것은 당연한 이치다. 토끼들이 파 놓은 굴도 여기저기 눈에 띈다. 어린 새끼 토끼들이 까마귀들의 공격을 피할 수 있도록 대나무 피신처도 만들어놨다.
‘토끼’로 시작해 ‘토끼’로 끝나는 오쿠노시마섬은 과거 일본군이 독가스를 만들고, 실험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일본군은 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군비 절감을 위해 대량 살상무기를 개발·생산하기 시작했다. 오쿠노시마에 살던 주민들을 쫓아내고 비밀리에 독가스 실험과 제조를 했다. 연구소, 독가스 제조공장 등 군사시설이 섬 여러 곳에 폐허로 남아있다. 1988년 개관한 ‘독가스 박물관’도 유료 입장이 가능하다.
섬에 토끼가 많이 서식하는 이유는 두 가지 설이 있다. 1971년 당시 인근 학교에서 방사된 8마리의 토끼가 증식했다는 것과 독가스 실험용으로 사육했던 토끼들이 개체수를 늘려왔다는 것.
우리나라 MBC 방송국의 ‘신비한TV 서프라이즈’에도 소개된 바 있는 오쿠노시마섬 토끼에 대한 진실은 현재까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