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야(瓦也) 연재>민족종교 ‘대종교’ 중광한 홍암 나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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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야(瓦也) 연재>민족종교 ‘대종교’ 중광한 홍암 나철 남도 문화·낭만 따라 걷는 ‘남파랑길(38)’   
  • 기사등록 2025-08-02 08: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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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저널=서울】발길은 다시 가까이에 있는 ‘김범우의 집’으로 돌린다. 올라가는 고샅길은 뚝뚝 떨어지는 장맛비에 좀 스산하고 무슨 이런 곳에 저택(邸宅)이 있을까 하는 마음이었으나, 양쪽으로 담쟁이가 빽빽한 외대문을 지나 마당으로 들어서면 안은 제법 넓다. 

 

김범우의 집 대문.

관리가 안 되는 안대문.

‘일(一)자’형으로 된 안채가 제법 품위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관리 주체가 누구인지 몰라도 보수와 관리가 잘 안 되는 것 같다. 안채 외의 다른 건물들은 일부가 떨어져 나간 것처럼 을씨년스럽다.

 

김범우의 집.

원래 이 집은 대지주 김씨 소유의 집으로, 작가 조정래와 이 집 막내아들과 친구였다고 한다. 소설 태백산맥에서는 품격 있고 양심을 갖춘 대지주 김사용의 집으로 그려진다. 사랑채, 안채, 창고자리, 장독대, 돌담 등 그 모든 형태와 규모들이 대 지주의 생활상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게 했다. 안채 오른쪽 앞부분 귀퉁이에 있는 돼지우리는 아무리 대지주라 하더라도 음식찌꺼기를 함부로 버리지 않으려고 돼지를 길렀음을 알 수 있다. 

 

벌교에 가면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 한 분 계신다. 바로 그 분은 보성군 벌교읍 칠동리 115에서 태어난 나철(羅喆, 1863∼1916) 선생이다. 나철은 1894년 동학 농민운동 때 과거에 장원 급제했다. 

 

나철 영정.(보성군)

벼슬길에 올랐지만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우리나라에 침략의 손길을 뻗어 오자 ‘유신회’라는 비밀 단체를 만들어 동지 몇몇과 함께 일본에 가서 “두 민족이 서로의 주권을 존중하면서 함께 발전해 나갑시다”라고 호소했지만 일본은 나철의 말을 무시했고, 곧 을사늑약을 체결해 외교권을 빼앗았다. 

 

나철은 이에 분노하며 일본 천황과 대신들에게 우리나라의 독립을 주장했다. 일본에서 돌아오는 길에 나라를 팔아먹은 친일파 이완용·박제순·이지용·권중현·이근택을 5적으로 정하고 이들을 없앨 계획을 세웠으나, 이 계획은 실행에 옮기기 전에 탄로가 나고 말았다. 많은 동지들이 체포되자 나철은 동지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혼자 모든 책임을 지고 감옥에 갇히게 됐다. 

 .

이때 나철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백성들을 하나로 묶는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감옥에서 풀려난 후 우리 민족을 하나로 묶고 민족의 자존심을 세워 나라를 지키기 위해 1909년에 ‘단군교’를 일으켰다. 음력 3월 15일을 ‘어천절(御天節)’이라고 해서 단군 승천 기념일로 삼아 큰 제사를 올렸다. 단군교는 환인과 환웅, 환검의 삼위일체인 한얼님을 받들어 민족 기운을 바로 세워야 비로소 나라가 바로설 수 있다고 일어선 것으로, 이듬해에 ‘대종교(大倧敎)’로 이름을 바꾸었다. 

 

나철 선생 생가 대문.

나철과 민족 지도자들은 대종교를 퍼뜨리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니며 강연을 했다. 대종교를 통해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항일 정신을 북돋웠다. 많은 동포들이 신자가 됐다. 나철은 교육을 통해 우리 민족정신을 일깨워 주기 위해 수십 군데에 학교를 세우기도 했다. 일본은 대종교를 종교 단체로 인정하지 않고 독립운동단체로 여겼다. 대종교를 중심으로 백성들이 하나로 모였기 때문에 대종교를 법으로 금지시키고, 심한 감시와 탄압을 했다.

 

활동이 어려워지자 나철은 단군의 유적이 있는 구월산으로 들어갔다. 일본총리와 조선총독에게 한국을 침략해 약탈한 것과 대종교 탄압을 각성하라는 훈계를 남기고 순교했다. 나철이 죽은 뒤 대종교는 독립운동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서일, 현천묵, 김좌진, 이범석 장군 등을 비롯한 청산리 대첩을 이끈 독립군 대부분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틀을 세운 신규식, 박은식, 신채호 등이 모두 대종교의 교인이었다. 

 

창시자 나철의 고향인 보성군 벌교읍에 그를 기념하는 ‘홍암 나철기념관’이 자리하고 있지만 이건 독립운동가 나철 개인을 기념하는 성격이 더욱 강한 반면, 대종교 등 민족종교를 통한 독립운동사(獨立運動史)나 조직과 자금 지원 등은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있다. 이는 일제강점기 때 조선의 민족종교 말살정책과 외래종교의 우대정책의 영향으로, 그 당시 사이비 또는 유사종교로 낙인(烙印) 찍혀 아직까지도 우리 사회에서는 한국 민족종교를 유사종교 또는 사이비종교로 오해하고 폄하하는 경우가 많다. 

 

◆글-와야(瓦也) 정유순

현 양평문인협회 회원

현 에코저널 자문위원

전 전주지방환경청장

전 환경부 한강환경감시대장

홍조근정훈장, 대통령 표창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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