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코저널=서울】실은 관중기념관을 먼저 보고 제나라역사박물관을 보았으나, 필자가 글을 구성하기 위해 순서를 바꿔 후기를 작성했다.
관중기념관.
기념관 구역 내에는 관중의 무덤과 유물이 전시돼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임치(린쯔) 제국고성(齊國古城)의 성곽은 둘레 21㎞로, 당시 7만 호가 거주했던 당대 최고로 번성한 도시였는데, 이 번영의 기반을 놓은 사람이 바로 관중(管仲)이다.
관중 상.
관중의 본명은 관이오(管夷吾, BC 725년∼BC 645년)이며, 자는 중(仲)으로 보통 성씨와 자를 합쳐 관중(管仲)으로 불린다. 관중은 제나라 영상현(潁上縣, 현재 안휘성 복양시 영상현)에서 태어났다. 중국 춘추시대 초기 제나라의 정치가이자 사상가로, 제환공을 춘추오패의 첫 번째 패자로 만드는데 큰 역할을 했다. 영상(潁上)은 영수(潁水) 근처에 위치한 상업 중심지로, 경제를 중요시 했던 관중의 사상은 여기에서 기인한 것 같다. 관중은 포숙과 너무 절친(切親)해 ‘관포지교(管鮑之交)’란 말이 생겨났다.
관중기념관 입구.
관중과 포숙(鮑叔)은 각각 제나라의 공자인 규(糾)와 소백(小白)을 모셨다. 제양공(齊襄公)이 관지보(管至父)와 연칭(連稱)에게 시해당하고 제나라의 군주 자리가 공석이 되자, 관중과 포숙은 각기 규와 소백을 모시고 제나라를 향했다. 중간에 관중이 소백을 죽이기 위해 화살을 쏘자 소백이 쓰러졌다. 하지만 소백은 허리띠에 있는 쇠고리에 화살을 맞았을 뿐 멀쩡했다.
관포지교 상.
소백이 먼저 제나라에 들어와 고혜(高傒)와 국의중(國懿仲)의 도움으로 제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제환공이다. 관중이 모시던 규가 죽고, 노(魯)나라로 망명했던 자신 역시 목숨이 위태로워졌으나, 포숙(鮑叔)의 천거로 그는 하루아침에 제나라의 재상에 오르게 된다. 그는 환공을 도와 제나라의 국력을 키웠다. 관중이 제환공에게 중용돼 재상이 됐을 때는 BC 686년이다.
관포지교관.
중원을 차지하고 있던 주 왕실의 통제력을 갈수록 약해지고 제(齊)·초(楚)·진(晉)·진(秦)·연(燕)·노(魯) 등 제후국(諸侯國)들이 차츰 중앙의 통제에서 벗어나 자국의 실리를 취하며 군웅할거(群雄割據)하던 시절이다. 관중이 재상이 된 후 BC 681년 노나라와의 전쟁에서 이겨 화의를 하던 과정에서 노나라의 장수 조말이 단도로 제환공을 위협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덕.(효·인·충·신)
조말(曹沫)은 제환공을 위협해 제나라에서 가져갈 노나라 영토를 돌려받았지만, 제환공은 영토를 돌려주지 않고 그를 죽이려 했다. 관중은 제환공을 말리며 군주가 한번 뱉은 말을 지키지 않으면 어떤 제후도 이후에 제나라를 믿고 따르지 못할 것이라며 ‘신의(信義)’에 대해 강조했다. 노나라는 영토를 다시 돌려받았지만, 제환공의 명성은 중원에 퍼졌다. 신의를 지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사람에게 신의처럼 값진 것이 없다는 것을 알려준다.
법.(예·의·염·치)
관중의 성공 비결은 그의 정치 철학을 정리한 ‘관자’의 ‘입정(立政)’편에 “군주가 살펴야 할 것은 세 가지다. 하나는 덕이 그 사람의 지위와 맞는지, 둘은 공이 녹봉과 맞는지, 셋은 능력이 그 자리에 맞는지 살피는 것이다(君之所審者三. 一曰德不當其位, 二曰功不當其祿, 三曰能不當其官)”라고 했는데, 요즘 식으로 바꾸면 능력인사, 공개인사, 업적주의다.
관자(관중)사당.
무사.
문치.
관중은 이 세 가지 인사 원칙에 따라 정치를 펼쳤고 성공했다. 관중은 전국을 9만 가구로 꾸린 다섯 개의 속(屬)으로 나누고, 각각 대부에게 정치를 맡겼다. 농작물 수확이 적은 속은 우두머리에게 책임을 물었으나, 단 한 번은 너그러이 눈 감아 주었다. 세 번 계속될 때에만 처벌했다고 한다. 과연 관중식 책임정치다.
◆글-와야(瓦也) 정유순
현 양평문인협회 회원
현 에코저널 자문위원
전 전주지방환경청장
전 환경부 한강환경감시대장
홍조근정훈장, 대통령 표창 등 수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