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코저널=서울】침수교(浸水橋)를 따라 이하를 건너면 동산이다. 동산(東山)에서 보면 서산(西山)의 모습이 잘 드러난다. 봉선사 석굴은 웅장하며, 개미집 같은 고양동과 빈양동도 한눈에 보인다.
이하(伊河).
‘이하(伊河)’는 중국 하남성에 있는 낙하(洛河, 뤄허강)의 지류로 난천현(栾川縣, 롼촨현)에서 발원해 숭현(嵩縣, 쑹현), 이찬현(伊川縣, 이촨현)을 거쳐 낙양시로 흘러 언사구(偃師區, 옌스구)에서 낙화와 합류한다. 동산(東山)에 있는 석굴은 모두 당나라 때 만들어졌다.
향산사.
동산 석굴은 지나가는 발치 끝으로 헤아리고, 바로 향산사로 향한다. 516년에 처음 건립했고, 687년 불교사원으로 재건된 향산사는 용문석굴의 맞은편에 있어 정면으로 보이는 위치에 있다.
향산사 입구.
자신의 왼팔을 잘라 달마대사의 제자가 됐다는 혜가(慧可)가 이 절에서 출가했고, 최초의 여황제 측천무후도 이곳에서 휴양했다. 중국의 문장가 백거이도 시와 술과 친구들과 어울리며 이곳에서 노년을 보냈다.
손문이 이용한 방.삼민혁명(三民革命)을 주도한 손문(孫文)과 장개석(蔣介石)도 이곳을 별장처럼 이용한 것 같다.
선도(善導).
초입의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 전각들을 둘러보고 내려오는 마당에는 당(唐)의 승려 선도의 좌상이 이하(伊河)를 굽어본다. 선도(善導, 613∼681)는 산동성(山東省) 임치(臨淄) 출신으로 어려서 산동성 밀주(密州)의 명승(明勝)에게 출가해 20세에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십육관(十六觀)을 닦았다. 도작(道綽)에게서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을 배우면서 염불삼매(念佛三昧)를 수양하고, 구칭염불(口稱念佛)을 전파하는 정토종(淨土宗)을 크게 일으켰다. 저서로는 관무량수불경소(觀無量壽佛經疏) 등 여러 권이 있다.
백거이(白居易).
그러나 아무래도 이곳은 당(唐)의 4대 문장가로 알려진 백거이와 깊은 인연이 있는 것 같다. 백거이(白居易, 772∼846)는 자가 낙천(樂天)이요 호는 취음선생(醉吟先生)·향산거사(香山居士)다. 산서성 태원(山西省 太原) 부근의 신정(新鄭)에서 출생했다. 이백(李白)이 죽은 지 10년, 두보(杜甫)가 죽은 지 2년 후에 태어났으며, 같은 시대의 한유(韓愈)와 더불어 ‘이두한백(李杜韓白)’으로 불러진다.
백거이탄신 1220주년 기념비.
대대로 가난한 관리 집안에 태어났으나, 어려서부터 총명해 5세 때부터 시 짓는 법을 배웠고, 15세가 지나자 주위 사람을 놀라게 하는 시재를 보였다. 800년 29세로 진사(進士)에 급제했고, 32세에 황제의 친시(親試)에 합격했다. 그 무렵에 지은 장한가(長恨歌)는 유명하다. 문학창작을 삶의 보람으로 여겨 그가 지은 작품의 수는 대략 3840편이나 되며, 문학으로써 정치이념을 표현하고 실제 행동에 옮기도록 했다.
한국백씨대표단 참배 기념비.
829년 58세가 되던 해 낙양에 영주하기로 결심해 웬만한 벼슬도 버리고 태자보도관(太子補導官)이라는 명목만의 직책에 자족하면서 시와 술과 거문고를 삼우(三友)로 삼아 ‘취음선생’이란 호를 쓰며 유유자적했다. 831년 원진 등 옛 친구들이 세상을 떠나자 인생의 황혼을 의식하고, 낙양 교외의 용문(龍門)의 여러 절을 자주 찾았다. 그 곳 향산사(香山寺)를 보수 복원해 ‘향산거사’라는 호를 쓰며, 불교로 기울어졌다.
백거이 묘소.
향산사 경내에는 백거이의 묘를 비롯해 비석과 시비(詩碑)가 있다. 한국백씨 전국종친회에서 백거이 묘소에 참배하고, ‘한국백씨대표단참배기념비’를 세웠다는 표석이 눈길을 끈다. 조상의 뿌리를 찾는 일은 소중한 것 같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역사도 만신창이가 된 고대사를 끝까지 추적해 찾아봤으면 한다.
용문석굴과 향산사의 규모가 세계적이지만, 경주 토함산 불국사와 석굴암이 규모와 숫자는 턱없이 모자라고 작아도, 더 우뚝한 모양새다.
◆글-와야(瓦也) 정유순
현 양평문인협회 회원
현 에코저널 자문위원
전 전주지방환경청장
전 환경부 한강환경감시대장
홍조근정훈장, 대통령 표창 등 수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