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야(瓦也) 연재>율곡 이이 학문·덕행 기리는 ‘자운서원’
기사 메일전송
<와야(瓦也) 연재>율곡 이이 학문·덕행 기리는 ‘자운서원’ 한탄강과 임진강(37)  
  • 기사등록 2024-02-10 07:37:06
  • 기사수정 2024-02-10 07:37:52
기사수정

【에코저널=서울】이왕 파주에 온 김에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에 있는 ‘율곡선생유적지’로 이동한다. 

 

율곡선생유적지.

이원수(李元秀)와 사임당 신씨(師任堂 申氏)의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난 율곡 이이(栗谷 李珥)는 외가인 강릉 오죽헌에서 출생했지만, 아버지의 고향인 파주의 율곡리에서 성장하고 학문을 익혔다. 

 

율곡기념관.

부모의 용꿈으로 점지된 율곡은 수재(秀才)의 재능이 있었다. 과거에 응시 9번 장원급제를 차지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는 별칭을 얻었고, 이런 율곡이 과거를 보러 가며 걸었던 길이 ‘율곡 이이 구도장원길’이다. 

 

율곡(좌)과 신사임당(우) 동상.

‘율곡선생유적지’ 삼문으로 들어서면 우측으로는 ‘율곡기념관’이 있고, 그 옆으로 신사임당과 율곡의 동상이 나란히 서 있다. 좌측으로는 신도비와 자운서원이 있으며, 중앙 좌측 위로 올라가면 율곡과 부모 등 가족묘원이 있다. 

 

율곡 신도비각.

율곡기념관(栗谷紀念館)은 율곡 이이(1536~1584)를 봉안하고 있는 자운서원 경내의 율곡교육연수원 제1연수관에 설치한 율곡과 신사임당의 유품을 112점을 전시하고 있는 전시실로 파주시청에서 관리한다. 

 

자운서원 문성사.

자운서원(紫雲書院)은 1615년(광해군 7) 지방 유림의 공의로 율곡 이이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창건돼 1650년(효종 원년) 자운(紫雲)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았다. 1713년(숙종 39) 김장생(金長生)과 박세채(朴世采)를 추가로 배향해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을 담당하다가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됐다. 1969년 지방 유림의 기금과 국비보조로 복원해 1975년과 1976년에 보수했다. 

 

자운서원 강인당.

높은 대지 위에 사당을 앉히고 사괴석 담장을 둘러 삼문 앞 계단으로 오르도록 설계했다. 사당은 6칸으로 익공계(翼工系) 형식 팔작지붕이다. 그외 신문(神門)과 동서 협문(夾門)은 양측면을 박공(牔栱)으로 마감한 솟을대문 모양이며, 묘정비(廟庭碑)가 세워져 있다. 매년 8월 중정(中丁)에 향사를 지낸다. 경기도기념물(제45호)로 지정됐다가, 2013년 2월 사적(제525호)으로 승격돼 ‘파주 이이 유적’에 포함됐다. 

 

율곡 이이 묘소(후면).

서원 우측의 언덕으로 올라가면 율곡을 포함한 가족묘원이 나온다. 율곡의 직계 가족이 중심 묘역에 나란히 잠들었다. 가장 윗자리에 율곡과 부인 곡산 노씨의 묘(경기도 기념물 제15호)가 전후합장 묘의 형태로 자리했다. 그 아래 맏형 이선과 부인 곽씨의 합장묘가, 그 아래에 모친 신사임당과 부친 이원수의 합장묘(경기도 기념물 제14호)가 있다. 가장 아래쪽은 율곡 선생의 맏아들인 이경림 묘다. 

 

율곡 부모 묘소.

가족묘원의 특이한 점은 율곡의 묘와 맏형 부부의 합장묘가 부모의 합장묘보다 위에 있다는 점이다. 이는 조선시대 종종 있었던 역장묘(逆葬墓)의 형태로 풍수를 중요시했던 당시의 풍습에 따른 것이라 하더라도 충효(忠孝)를 더 중시했던 당시 상황으로는 좀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율곡 부부의 묘가 전후 합장 방식으로 조성한 것은 부인 노씨가 왜인을 꾸짖다 살해됐기 때문이라고 한다. 

 

율곡 이이 영정.(한국은행)

율곡 이이가 1583년 병조판서 재직 때 ‘시무육조(時務六條)’를 바치며 십만양병설 등 개혁안을 주장했으나, 당시 반대파의 “당쟁을 조장한다”는 탄핵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이듬해인 1584년 정월에 49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시무육조에는 “창업(創業) 보다 수성(守成)이 더 어렵고, 수성보다 경장(更張)이 더 어렵다”고 서술하고 있다. 율곡의 정신으로 시대를 개혁하는 마음을 다짐해 보는 것도 생각해 볼 일이다. 

 

철책 넘어 항강과 임진강의 합류.

이제 한탄강과 임진강 도보 답사 마무리를 위해 파주시 탄현면 성동IC 부근으로 이동한다. 탄현면(炭縣面)은 원래 교하군(交河郡)에 속해 있던 탄포면(炭浦面)·현내면(縣內面)·신오리면(新五里面)을 통합해 파주군에 편입시키면서 탄포면의 탄(炭)자와 현내면의 현(縣)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에서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 조강(祖江)이 되어 김포 애기봉 아래로 하여 서해로 흘러 들어간다. 철조망 옆으로 다가갈 수 없어서 먼발치로 바라보는 마음이 무겁다.

 

우리 헌법 제3조는 대한민국의 영토를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규정한다. 엄연한 한반도인 북녘땅이 왜 철조망으로 가로 막혀 있을까? 언제쯤 남북을 가로막은 철조망이 걷히고, 북녘 땅 평양과 신의주를 거쳐 고구려의 혼이 서린 압록강 너머 만주 땅까지 마음 놓고 갈 수 있을까? 바람도 구름도 새들도 자유로이 넘나들고, 지금은 철길이 북으로 쭉 뻗어 있는데 달리고 싶은 녹 슬은 화통만 남아 있다. 

 

‘한탄강과 임진강’ 연재를 마칩니다. 다음 회부터는 ‘태양, 파도와 함께 걷는 해파랑길’을 연재합니다.

 

◆글-와야(瓦也) 정유순

현 양평문인협회 회원

현 에코저널 자문위원

전 전주지방환경청장

전 환경부 한강환경감시대장

홍조근정훈장, 대통령 표창 등 수상

관련기사
0
기사수정
  • 기사등록 2024-02-10 07:37:06
나도 한마디
※ 로그인 후 의견을 등록하시면, 자신의 의견을 관리하실 수 있습니다. 0/1000
확대이미지 영역
  • ‘동해 품은 독도’ 촬영하는 박용득 사진작가
  • <포토>‘어도를 걸을 때’
  • 설악산국립공원 고지대 상고대 관측
최신뉴스더보기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